50살에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숫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얼마가 있으면 회사를 그만둘 수 있을까.
처음에는 답이 꽤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30억.
왜 정확히 30억이었는지는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애매하다.
누가 30억이 있어야 은퇴할 수 있다고 정해 준 것도 아니고, 아주 정교한 계산 끝에 나온 숫자도 아니었다.
다만 이것저것 계산해 보다 보니 그 정도가 있으면 꽤 안전할 것 같았다.
30억이라는 숫자는 컸고,
쉽게 닿을 수 없어 보였고,
그래서 오히려 안심이 됐다.
저 정도만 만들면 그다음부터는 괜찮겠지.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30억이라는 숫자가 편했던 이유
은퇴를 생각하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앞으로 내가 얼마를 쓰게 될지도 모르고,
투자수익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몇 살까지 살지도 모르고,
예상하지 못한 큰돈이 언제 필요할지도 모른다.
반면 30억이라는 숫자는 아주 단순하다.
30억을 만들면 된다.
목표가 생기고,
현재 자산과 비교할 수 있고,
매년 얼마나 더 투자해야 하는지도 계산할 수 있다.
복잡했던 문제가 갑자기 하나의 숫자로 바뀐다.
나처럼 숫자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꽤 매력적인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30억의 3%만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연간 9천만 원이다.
월평균으로 나누면 750만 원 정도다.
물론 세금도 있고 실제 수익률도 달라질 것이고 물가도 오르겠지만,
처음 생각했을 때는 꽤 그럴듯해 보였다.
30억을 만들고, 그 돈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살아간다.
아주 깔끔했다.
그런데 이상한 질문이 하나 생겼다
계속 계산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0억이 있으면 정말 은퇴할 수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전 재산 30억이 모두 변동성이 큰 주식에 들어 있다고 해보자.
회사를 그만둔 바로 다음 해에 주식시장이 크게 하락한다면 어떨까.
30억이 20억이 될 수도 있다.
그 상황에서 매달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계속 팔아야 한다면 생각보다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반대로 자산이 30억보다 적더라도 매달 생활비를 충분히 충당할 수 있는 현금흐름이 나오고,
몇 년 동안 시장이 좋지 않아도 자산을 팔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어떨까.
그쪽이 오히려 더 은퇴에 가까운 상태일 수도 있다.
그때부터 질문이 조금 달라졌다.
얼마가 있어야 은퇴할 수 있을까?
에서
회사가 없어도 내 생활이 계속 돌아가려면 어떤 구조가 필요할까?
로.
자산의 크기와 생활비는 다른 문제였다
30억이라는 숫자만 바라볼 때는 자산의 크기만 생각했다.
그런데 은퇴 후 실제 생활은 자산총액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매달 카드값을 내야 하고,
관리비를 내야 하고,
여행도 갈 것이고,
병원에 갈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했던 돈도 필요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한 달에 얼마를 쓰고,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였다.
가령 한 달 생활비가 700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1년에 8,400만 원이 필요하다.
그 돈을 매년 주식을 팔아서 만들 것인지,
배당이나 이자 같은 현금흐름으로 만들 것인지,
일부는 현금으로 준비해 둘 것인지에 따라 같은 자산이라도 은퇴의 안정감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제야 알게 됐다.
30억이라는 자산보다 먼저 알아야 할 숫자는 내가 실제로 살아가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였다.
나는 주식을 팔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주식을 장기적으로 보유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시장이 많이 떨어져도 가능하면 팔지 않고 버텨 왔다.
오히려 여유자금이 생기면 더 투자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내가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매달 생활비를 만들기 위해 주식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이상했다.
특히 시장이 좋지 않을 때는 더 그렇다.
주가가 크게 떨어졌는데도 생활비 때문에 주식을 팔아야 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 온 투자 방식과 정반대의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은퇴 이후에도 가능하면 성장자산은 계속 성장할 시간을 주고 싶다.
생활비는 다른 곳에서 나오게 만들고 싶다.
배당일 수도 있고,
이자일 수도 있고,
일부는 커버드콜 같은 현금흐름 자산일 수도 있다.
물론 높은 분배금을 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투자인 것은 아니다.
분배금이 많아 보여도 자산 가격이 계속 줄어든다면 결국 내 돈을 조금씩 꺼내 쓰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단순히 ‘배당률이 몇 퍼센트인가’만 보는 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또 같은 문제로 돌아왔다.
총자산이 얼마인가보다 그 자산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30억이 있어도 불안할 수 있다
처음에는 30억이 있으면 아주 여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30억의 자산이 있어도 큰 대출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매달 들어오는 돈이 거의 없다면 그것도 다르다.
은퇴 직전에 큰 하락장이 오면 또 달라진다.
반대로 현금과 비교적 안정적인 자산이 충분해서 몇 년 동안 주식을 팔 필요가 없다면 상황은 상당히 달라진다.
그래서 은퇴 직전에는 단순히 투자수익률을 높이는 것만큼이나 큰 하락장이 와도 강제로 자산을 팔지 않을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시장이 떨어져도 월급이 들어온다.
오히려 싼 가격에 주식을 더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월급이라는 안전장치가 사라진다.
같은 주식시장 하락이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결혼을 생각하면 계산은 또 달라진다
혼자라면 내가 쓰는 돈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둘의 생활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배우자도 계속 일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 소득이 있다면 실제 생활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돈을 내가 은퇴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계산하고 싶지는 않다.
배우자의 소득이 있어야만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내가 선택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라면,
그 선택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도 어느 정도는 내가 만들어 두고 싶다.
배우자의 소득은 그 위에 더해지는 여유였으면 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은퇴 기준은 조금 더 보수적이다.
그러면 얼마가 있어야 하는 걸까
재미있는 것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답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간단했다.
30억.
지금은 그렇게 한 숫자로 대답하기가 어렵다.
자산이 얼마인지도 중요하지만,
내가 얼마를 쓰는지도 중요하고,
세후로 얼마의 현금이 들어오는지도 중요하고,
대출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중요하고,
현금이나 안전자산으로 몇 년을 버틸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이 좋지 않을 때 성장자산을 억지로 팔지 않아도 되는가가 중요하다.
그래서 요즘은 하나의 목표금액보다 이런 것들을 같이 보려고 한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매달 생활비가 만들어지는가.
큰 하락장이 와도 몇 년 동안 버틸 수 있는가.
부채 때문에 다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선택을 다시 해야 하지는 않는가.
이 조건들이 갖춰졌다면 자산이 꼭 30억이 아니어도 은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대로 30억이 있더라도 이 구조가 없다면 아직 준비가 끝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30억이라는 숫자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30억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내가 가는 방향을 확인하기에는 편리한 숫자다.
투자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 계산할 때도 쓸 수 있고,
현재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확인할 때도 유용하다.
다만 예전과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예전의 30억은 도착점이었다.
30억을 만들면 게임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했다.
지금의 30억은 하나의 이정표에 가깝다.
그 숫자에 도달했느냐보다 그때 내 자산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매달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를 쓰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앞으로 10년 동안 확인해야 할 것
첫 번째 글을 쓰면서 나는 결국 자유를 원하는 이유가 돈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선택권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돈에 대한 목표 역시 그 목적에 맞아야 한다.
통장이나 증권계좌에 특정 숫자를 찍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돈으로 내 시간에 대한 결정권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동안 내가 확인해야 할 것도 조금 더 분명해졌다.
내가 실제로 한 달에 얼마를 쓰는지.
회사를 그만둔 뒤 어떤 방식으로 현금흐름을 만들 것인지.
성장자산과 현금흐름 자산을 어느 정도로 나눌 것인지.
부채는 언제까지 얼마나 줄일 것인지.
그리고 시장이 크게 떨어져도 내 계획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아마 이 숫자들은 앞으로 계속 바뀔 것이다.
내 생각도 바뀔 것이다.
그래도 지금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내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30억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회사 없이도 내가 원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다.
처음에는 30억이 있어야 은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30억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이 나 대신 내 시간을 벌어 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50살까지 만들어 보고 싶은 두 번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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